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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장현식선생과 고택(안채)

일송 장현식, 한그루 소나무 같은 의인
장현식선생/조선어학회 단체사진
김제 금구 출신 일송(一松) 장현식(張鉉植, 1896~1950) 선생은 당대 만석을 누렸던 부호중의 부호였다. 그러나 일송은 부호로서 보다 독립운동가요 사회사업가와 정치가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지도자였으며 파란만장한 이 나라의 근대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애국지사다.

1919년 4월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군영자금을 제공하였고, 대동신문 재정운영을 맡다 체포되어 1921년 징역3년을 언도받고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선생은 교육사업에 적극 뛰어들어 민족사학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고, 고려대 설립 당시 본관 2층 8칸 교실을 도맡아 지었으며 동아일보 창간 때는 인쇄기 구입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민족어 보존을 위한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3,000원을 제공, 이로인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정인승,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독립운동자금 수 만원을 아낌없이 기부해 조국의 독립을 지원했으며 이외에도 당대 예술가나 명명가들에게도 후원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해방 후 전라북도 2대 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한 선생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8일,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그해 10월 24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선생의 유해는 평양의 재북 인사릉에 인장되어 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항일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애국투사 일송 장현식 선생, 흠결 없는 의인으로 숭앙함이 마땅하다.
의로운 뜻을 품은 장현식 고택
장현식 고택(안채)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이며 정치가인 일송 장현식 선생이 1932년 고향인 김제 금구면 서도마을에 건축한 한옥을 전주한옥마을로 옮겨 왔다.

장현식 선생의 후손인 장남 장홍 씨가 2007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김제시 금구면 전통한옥(안채와 중간채) 일체를 기부했으며 전주시는 이를 전주한옥마을로 이축, 2009년 12월 새로 단장하기에 이르렀다.
장현식 선생 고택은 1930년대 전통방식으로 건축한 한옥으로, 근대 한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목재가공의 수준이 아주 정교해 전통한옥으로서 건축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미닫이 문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고안된 안채의 퇴창문은 보는 재미 뿐만 아니라 한옥 대목수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보기 드문 문이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이 고택의 의미는 일제하 독립투사로 평생을 바친 일송 장현식 선생의 항일구국의 원천이자 나눔과 섬김의 정신으로 대동세상을 실현하였던 의로운 기상이 담긴 곳, 고난의 연대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장씨 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함께 하고 있기에 특별함이 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