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원

문화적 자부심과 선비의 기개와 전라도의 풍류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

연수원소개

동헌고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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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고택이야기

전주동헌

전주 동헌인 풍락헌(豊樂軒)은 음순당(飮醇堂)으로도 불리었으며 조선시대 전주부윤(종2품)의 업무공간으로 지금의 전주시청에 대응된다.

조선 초에 건립된 후 1891년(고종28년) 중건(重建)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일제가 조선말살정책을 펴면서 1934년 민간에 매각되었다. 당시 동헌을 구입한 전주유씨는 이를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로 옮겨 문중의 제각으로 사용하였다.

동헌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하여 2009년 당시 송하진 전주시장의 노력으로 소유주인 유인수 선생이 제각 건물을 전주시에 쾌척(2007년)함으로써 한옥마을로 옮겨졌다. 동헌이 전주를 떠난지 75년만의 귀환이다. 처음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28칸 팔작한옥이었던 동헌은 옮기는 과정(1934년)에서 정면 한칸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2009년 현위치에 28칸으로 원형복원되어 이축(移築)되었다.

동헌은 120여년 된 옛 건축물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현판인 풍락헌은 『조선왕조의 발상지 풍패지향 전주(豊)를 안락(樂)하게 하는 집(軒)』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다른 이름인 음순당은 『임금의 덕이 마치 가장 순수한 술을 마신 것처럼 모르는 사이에 취했다가 깨는것처럼 임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의미이다.

전주 동헌은 관찰사(종2품), 부윤(종2품), 판관(종5품)의 집무실이라고 다양하게 일컬어지는데, 전주부윤의 자리는 관찰사가 겸임한 때가 많았고, 관찰사가 겸임할 때는 대부분 중앙에서 나온 판관이 전주부를 통치했던 연유에서 기인한 명칭들이다. 그러나 원래 전주 동헌은 전주부윤의 집무실이고 선화당은 전라도 관찰사의 집무실이다.

장현식고택(안채 ·중간채)

장현식 선생 고택은 1930년대 전통방식으로 건축한 한옥으로, 근대 한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장현식 선생의 후손인 장남 장홍 씨가 2007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김제시 금구면 전통한옥(안채와 중간채) 일체를 기부했으며 전주시는 이를 전주한옥마을로 이축, 2009년 12월 새로 단장하기에 이르렀다.

목재가공의 수준이 아주 정교해 전통한옥으로서 건축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미닫이 문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고안된 안채의 퇴창문은 보는 재미 뿐만 아니라 한옥 대목수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보기 드문 문이다.

독립운동가 장현식선생과 고택(안채)

일송 장현식, 한그루 소나무 같은 의인

김제 금구 출신 일송(一松) 장현식(張鉉植, 1896~1950) 선생은 당대 만석을 누렸던 부호중의 부호였다. 그러나 일송은 부호로서 보다 독립운동가요 사회사업가와 정치가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지도자였으며 파란만장한 이 나라의 근대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애국지사다.

1919년 4월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군영자금을 제공하였고, 대동신문 재정운영을 맡다 체포되어 1921년 징역3년을 언도받고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선생은 교육사업에 적극 뛰어들어 민족사학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고, 고려대 설립 당시 본관 2층 8칸 교실을 도맡아 지었으며 동아일보 창간 때는 인쇄기 구입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민족어 보존을 위한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3,000원을 제공, 이로인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정인승,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독립운동자금 수 만원을 아낌없이 기부해 조국의 독립을 지원했으며 이외에도 당대 예술가나 명명가들에게도 후원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해방 후 전라북도 2대 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한 선생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8일,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그해 10월 24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선생의 유해는 평양의 재북 인사릉에 인장되어 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항일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애국투사 일송 장현식 선생, 흠결 없는 의인으로 숭앙함이 마땅하다.

의로운 뜻을 품은 장현식 고택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이며 정치가인 일송 장현식 선생이 1932년 고향인 김제 금구면 서도마을에 건축한 한옥을 전주한옥마을로 옮겨 왔다.

장현식 선생의 후손인 장남 장홍 씨가 2007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김제시 금구면 전통한옥(안채와 중간채) 일체를 기부했으며 전주시는 이를 전주한옥마을로 이축, 2009년 12월 새로 단장하기에 이르렀다.
장현식 선생 고택은 1930년대 전통방식으로 건축한 한옥으로, 근대 한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목재가공의 수준이 아주 정교해 전통한옥으로서 건축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미닫이 문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고안된 안채의 퇴창문은 보는 재미 뿐만 아니라 한옥 대목수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보기 드문 문이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이 고택의 의미는 일제하 독립투사로 평생을 바친 일송 장현식 선생의 항일구국의 원천이자 나눔과 섬김의 정신으로 대동세상을 실현하였던 의로운 기상이 담긴 곳, 고난의 연대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장씨 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함께 하고 있기에 특별함이 더하다.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이며 정치가인 일송 장현식 선생이 1932년 고향인 김제 금구면 서도마을에 건축한 한옥을 전주한옥마을로 옮겨 왔다.

장현식 선생의 후손인 장남 장홍 씨가 2007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김제시 금구면 전통한옥(안채와 중간채) 일체를 기부했으며 전주시는 이를 전주한옥마을로 이축, 2009년 12월 새로 단장하기에 이르렀다.
장현식 선생 고택은 1930년대 전통방식으로 건축한 한옥으로, 근대 한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목재가공의 수준이 아주 정교해 전통한옥으로서 건축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미닫이 문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고안된 안채의 퇴창문은 보는 재미 뿐만 아니라 한옥 대목수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보기 드문 문이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이 고택의 의미는 일제하 독립투사로 평생을 바친 일송 장현식 선생의 항일구국의 원천이자 나눔과 섬김의 정신으로 대동세상을 실현하였던 의로운 기상이 담긴 곳, 고난의 연대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장씨 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함께 하고 있기에 특별함이 더하다.

임실진참봉고택(사랑채)

장혁식 고택 앞 사랑채 건물은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에 소재한 진참봉댁 고택 사랑채를 옮겨 온 것으로 정확한 건축연도는 알 수 없다.

안채는 용인 민속촌 조성 시 매각되어 이축되었는데, 이 사랑채는 김봉순 씨가 매수하여 생활해 오던 중 임실군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개설사업 당시 철거 예정이던 건축물을 전주시가 온전하게 인수하여 장현식 고택 옆에 이축하였다.

정읍고택(별채)

정읍고택은 보천교를 창시한 월곡 차경석(1880~1936)이 정읍 대흥리에 세운 50여 채의 보천교 본당 부속 건물의 하나로 전해진다.

1936년 보천교가 해체된 뒤, 정읍지역의 유지가 사들여 정읍시 장명동으로 옮긴 것을 1988년 박성기님(박중조의 부친)이 내장산으로 다시 옮겨 사용하였다.
자연공원법의 제정으로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고택의 유지 보수가 용이하지 않아 점차 폐가로 쇠락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소유자 박중조님이 2010년 전주시에 기증함으로써 2011년 6월 이전 복원하여, 전주전통문화연수원에서 활용하고 있다.
ㅁ자 건물의 정읍고택은 보온 효과를 높이고 바람을 막으려는 북부지방의 한옥 양식으로, 중부지방 이남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다.